직원들의 정신건강은 안전하고 건강한 사업장을 위한 중요한 요건
배경 : 공중보건학의 접근법과 주요 가정
종종 주변에서 보건학은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 분야인지 설명해 달라는 말을 듣는다. 의학이나 약학처럼 그 분야를 상징하는 이미지나 경험이 바로 떠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보건학 역시 의약학 분야처럼 질병의 예방과 건강 향상을 목표로 한다. 다만 보건학은 임상clinical area 분야처럼 개인의 유병有病 그 자체보다는 건강 위협에 노출된 인구 집단의 건강 상태에 더 큰 관심이 있다. 예를 들어, 임상 연구가 비만으로 유발될 수 있는 대사내분비계 질환을 진단 받은 중년의 여성 환자가 의료진이 권고한 치료법을 준수함으로써 생기는 비만을 포함한 건강 결과의 변화를 주목한다면, 보건학의 관점에서는 중년 여성 근로자가 다수인 사업장에서 앉아서 일해야 하는 근로 시간이나 비만 예방에 맞춰진 사업장 건강 중재intervention의 존재 여부 등에 따라 비만 수준이 달라지는지, 또 근로자 비만과 사회적 질병 부담 및 생산성 저하의 관계에 보다 큰 관심을 둔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보건학은 건강에 대하여 특히 두 가지를 중요시 한다고 볼 수 있는데, 하나는 모두에게 건강 수준은 같지 않으며, 각자의 건강 수준은 유전적인 요인 외 교육, 경제, 고용 등 사회적 조건과 양질의 보건의료 서비스에 접근하고 활용할 수 있는 제도적인 조건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건강 문제가 개인의 삶에 재난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건강 위험의 사전 예방을 개인에게 맡기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제도화하는 집합적인collective 노력이 필수라는 것이다.
맥락 : 중대재해처벌법의 시행과 사전예방적 사업장 정신건강 관리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 1년을 향해 간다. 지난 8월 2022년 한국 노동사회 포럼을 찾은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의 발언을 통해 다시금 강조된 것처럼,1 이 법의 제정 취지는 처벌이 아니라 예방에 있다. 계속되는 사업장 중대 재해 사고로 개인과 사회에 되돌이킬 수 없는 피해가 초래되는 것에 대해 사후 책임을 무겁게 함으로써 사업장 건강과 안전을 확보하려는 사전 예방적 노력을 실질적으로 강화하자는 것이다.
대부분 중대재해라고 하면 심각한 신체적 부상이나 질환 및 관련된 사망을 우선 생각한다. 그러나 본고를 통해 중대재해 예방을 위한 노력에 근로자 정신건강 악화를 막고 다루는 노력을 함께 강조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고자 한다. 여기서 말하는 정신건강은 흔히 정신병으로 부르는 정신질환이 없는 상태로 국한되지 않는다. 따라서 사업장 정신건강은 정신질환이나 문제가 있는 직원의 규모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근로자들에게 사회를 원만하게 살아가고, 직장과 가정에서 만족스러운 일상을 유지할 수 있도록 자기 생각과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역량이 있고, 사업장에서 다양하게 벌어질 수 있는 스트레스 상황이 근로자의 감정과 정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적절한 대처와 극복의 환경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유감스럽게도 아직까지 사업장 정신건강 예방과 관리 노력은 중요성에 비해 실제로는 걸맞은 의제로 다뤄지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최근 de Oliveira et al. (2022)등은 2008년부터 2022년까지 발표된 사업장 정신건강 논문 중 기준에 적합한 38편을 고찰하면서, 우울이나 불안 등 근로자의 악화된 정신건강 상태는 결근이나 프리젠티즘(출근은 했지만 육체적・정신적 컨디션이 정상적이지 못할 때, 업무의 성과가 떨어지는 현상)을 통해 생산성 저하와 뚜렷한 상관 관계를 보인다고 보고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기구들은 열 중 한 명 이상의 성인 취업 연령 인구가 정신적 어려움을 겪는데도 사업장에서 정신건강 관리가 우선순위가 아니라는 문제를 지적한다.2 국내에서도 근로복지공단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산업재해로 인정되는 6대 정신 질병(우울증, 불안장애, 적응장애,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자해 행위 및 자살, 수면장애 등)으로 산업재해를 신청한 근로자가 2017년 213건 2019년 331건, 2020년 581건, 2021년 720건으로 해마다 증가하고 있으나, 이를 개선할 획기적인 변화의 계기는 아직 미비인 듯하다.
사업장 정신건강 관리를 사후 대응보다 사전 예방적으로 다룰 때 비용 효과적일 수 있음은 또 다른 점에서도 뒷받침된다. 신체적 외상이나 부상 등과 다르게 정신적인 외상은 동료, 상사, 가족 등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은 물론 당사자 자신의 인지가 늦거나 없는 경우가 적지 않다. 설령 마음이 아프고 마음에 병이 난 것 같은 신호가 있더라도 정신건강 문제를 즉각 공개, 공유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 결과 양질의 의료 서비스에 접근하고 이용하는 기회는 지연되거나 불발되고, 다른 신체 질환과 마찬가지로 이처럼 지연된 치료 시작은 더 긴 치료나 도움을 필요로 하게 된다.
사업장 울분 workplace embitterment의 사례
사업장은 물리적인 환경으로서만이 아니라 사회·심리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건강 위험 요인이 될 수 있다. 사업장에서 사람들이 수직, 수평적으로 맺는 공식적 비공식적관계가 만들어내는 규범과 문화가 근로자에게 중대한 스트레스의 원천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Michailidis, 2017, Sensky et al., 2015).
사업장에서 근로자가 정신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받게 되는 과정에 대해 그동안 스트레스 이론 등이 소개되었다. 본고에서는 근로자의 감정조절의 어려움을 언급하고자 한다. 감정emotion은 ‘나와 세상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 내리는 평가적 판단’ evaluative judgement 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감정을 비합리적인 것, 즉흥적인 것, 타고나는 것 등으로 여겨왔고 실제 보건학 연구에서 크게 주목하지 않은 주제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감정은 합리적이든 아니든, 심사숙고한 것이든 아니든 감정의 주체가 당면한 대상이나 상대의 속성에 대해 자신의 이해나 믿음에 기반하여 내리는 반응이고, 감정은 곧 강력한 행위의 동기로 작동한다. 만일 평가의 대상과 상대가 일으키는 일이 근로자 자신의 기본적인 이해와 믿음을 위배하거나, 인격 공격으로 여겨지고 이 과정에서 상당한 고통을 주는 경우, 적절한 감정 조절과 극복에 어려움을 겪게 되고,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채 지속, 누적되는 경우에는 극심한 정신적 타격을 입을 수 있다.
이를 엿볼 수 있는 사례의 하나로 근로자의 울분鬱憤을 설명해보고자 한다. 사전적으로 울분embitterment은 답답하고 분한 마음이 가득한 감정 상태이다. 외상후울분장애PTED라는 울분의 정신장애 상태를 연구해 온 린든(2009)은 역설적이게도 울분은 사실 누구나 아는 감정이며, 모두가 경험하는 감정이라고 말한다. 린든에 따르면 울분은 경미한 수준부터 파괴적인 수준까지 일종의 스펙트럼을 이루는 감정인데, 공통점은 부당하고 정의에 어긋나는 일로 느껴지는 일 동시에 매우 모욕적이라고 여겨지는 일 예컨대 이혼이나 해고, 주변의 배신과 차별이 경험되면서 유발되는 감정이다.
대개는 울분을 극복하지만, 울분의 감정이 극심하면 자아 보호에 실패하고 일상적인 역할 수행이 불가능해지는 장애 상태에 이른다. 이런 수준의 울분은 자신에게 벌어진 부당한 일을 인격을 향한 공격으로 여기게 되고 도저히 멈출 수 없는 강박적이고 파괴적인 사고에 빠지고, 반격을 도모하면서 강력한 복수심에 타오르지만 동시에 일을 막지 못한 자기 비난과 아무 희망이 보이지 않는 무력감에 빠지게 된다. 정신건강의학 전문가들은 이런 외상후울분장애의 치료 효과를 낮게 본다. 의료진과의 치료 동맹 역시 형성되거나 지속되기 어렵다고 한다. 달리 말해 울분은 정신적 장애나 질환 이전에 정상 범위 안의 감정으로 조절되도록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사업장 정신건강 관리, 구체적으로 근로자의 건강한 감정 조절 지원 차원에서 시사점이 있다고 보는 울분 유발의 요인을 두 가지 들어본다. 하나는 근로자의 나름의 기여와 노력에 대한 주변의 무효화無效化, invalidation 환경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사업장에서 벌어지는 의사결정과 절차에 대해 근로자가 품고 있는 (세상의) 공정함에 대한 믿음이다.
본래 무효화는 아동 정서발달 문헌에서 강조해 왔다. 간단히 말해, 무효화는 아이의 정서표현이나 관련 경험을 무시하거나 평가절하하고, 불인정하는 양육 환경을 뜻하는데 이런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는 자신의 정서를 인지하고 조직화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부적절한 대처를 발달시킨다고 알려졌다(구본용, 송지숙, 2019, Salsman & Linehan, 2006). 이후 무효화는 류마티즘 같은 만성질환을 앓는 근로자의 건강 연구에 적용되는데(Kool 등 2009), 쉽게 드러나지 않는 (얼핏 정상적인) 만성 질환이 있는 근로자가 자신의 고통과 어려움 나아가 그 조건에서 해 낸 성과나 노력에 대해 주변으로부터 몰이해나 평가절하 등 (무효화)을 경험하는 경우 정신, 신체적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조명한 것이다.
세상의 공정함에 대한 믿음은 달버트Dalbert등이 다루는 정의 심리학justice psychology의 내용을 참고할 수 있다. 본래 공정함에 대한 신념은 어릴 때부터 형성되고 도전 받지 않는 굳건한 가치에 가까운 신념으로, 사람들은 이런 신념을 통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정당화하거나 납득하게 된다. 예컨대 나쁜 일은 나쁜 사람에게 일어나기 마련이거나, 사람들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상응하는 대우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달버트 등은 세상은 기본적으로 공정할 것이며Belief in a Just World, 자신에게 중요한 일의 절차나 결정에서 세상은 자신에게 공정할 것이라는 믿음Belief in a Just World in person을 측정하는 두 개의 도구를 개발하면서, 이런 믿음은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어서, 누군가 극심한 부정의나 불공정을 경험하게 되면 이런 믿음이 훼손되고 깨질 수 있으며 그에 대한 반응으로 울분이 유발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비록 탐색적인 수준이기는 하나, 사업장 근로자의 울분을 다룬 일부에서 근로자 울분 점수와 사업장의 절차적 공정성이나 조직 지원support 인식 수준 사이에 관련성이 보고되었고 같은 맥락에서 직장 내 갈등(괴롭힘, 따돌림 피해) 경험을 보고하는 근로자 대부분이 울분이 높게 나타났다(Karatuna & Gok, 2014; Ege, 2010).
결론
2007년 저명 의학 학술지 란셋은 전세계 질병 부담의 14%는 정신건강과 관련된 문제에서 비롯된다면서 정신건강 없이는 온전한 건강은 없다“no health without mental health”고 말한 바 있다(Prince 외, 2007). 점차 더 많은 국제기구들도 ‘이제는 일과 일터가 정신건강에 미칠 수 있는 해로운 영향에 초점을 맞출 때’라고 호소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새롭게 또한 계속해야 하는가? 보건학의 접근법, 중대재해처벌법, 그리고 울분으로 이어지는 내용을 통해 본고는 세 가지를 공유해보고자 했다. 우선은 사업장 중대재해 예방을 위한 건강과 안전 확보의 전략 속에 사업장 정신건강을 전면에 배치하고 구체적 계획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 특히나 심각한 외상에 해당하는 정신건강 문제 이전에 근로자의 정서와 감정에 일상적인 마모wear and tear를 일으키는 사업장 관련 문제를 찾고 해결 방안을 구체적으로 모색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일례로 포스코에서는 ‘직원이 건강해야 회사도 건강하다’는 경영방침에 따라 직원의 정신건강 케어를 위한 마음챙김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이의 활성화를 위해 심리상담인력 및 시설을 충원한 것으로 알려졌다.3 더 많은 사업장에서 더 적극적인 기획과 전략 실행이 필요하다. 둘째, 사업장 규범과 문화 그 자체가 근로자 정신건강 문제를 유발하는 원천이 될 수 있음을 가정하고, 일명 관계-재난적 상황 (예: 집단 따돌림, 차별, 배제)을 사전에 막을 수 있는 행동 규범과 준칙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상대적으로 취약한 사업장 내 내집단을 향한 공동체의 선의와 배려collective faith 예컨대 공감과 이해 배려와 존중은 필요하지만, 이를 개인에게 맡기지 않는 관습을 제도화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셋째, 개인의 감정조절 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코칭coaching 등 집단 학습과 지원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감정은 타고난 것보다 학습, 훈련되며 또 세상에 나쁜 감정은 없다는 접근도 필요하다. 울분의 경우도 외상에 해당하는 울분장애는 심각한 문제이지만 정상적인 감정으로서의 울분은 세상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불공정이나 부정의로부터 공정과 정의를 되찾으려는 추구이자, 이 과정에서 변화를 이룬다면 성장growth의 동력으로 고려될 수 있다.
더 나은 세상에서 더 좋은 건강은 필수적이다. 일과 일터의 주체이자 구성원인 근로자의 정신건강 역시 더 안전하고 건강한 사업장을 위한 필수적인 요건이다. 앞으로 사업장 정신건강이 더 적극적으로 다뤄지기를 희망한다.
출처 : 기업시민리서치 1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