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재해처벌법」상 기업시민의 법적지위와 시민市民으로서의 품격

 

 

 

 

기업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

기업시민corporate citizenship이란,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공유가치창출CSV, 기업의 지속가능성corporate sustainability,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 등의 개념을 포섭하면서도 보다 윤리적이고 탄력적이며 지속가능한 기업 경영의 실천을 담보하는 경영 철학을 실천하기 위한 상징적 개념이다(Dave Stangis et al., 2016). 대한민국 헌법상 기본권을 향유하는 법률행위의 주체는 원칙적으로 국민인 사람人이며, 외국인 또는 법인法人은 예외적으로 법인격을 부여받을 뿐이라는 점에서 ‘기업시민’을 법체계 내로 직접 수용하는 것은 용이하지 않을 수 있다. 전통적인 경제학은 기업이 환경이나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외부 효과로 치부해 왔으며, 결과적으로 부의 편중과 환경오염 등과 같은 각종 사회문제는 규제와 법적 기준을 통해 해소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즉, 환경, 사회, 지배구조와 같은 비재무 요소들이 기업의 미래 가치와 지속가능 여부를 판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진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최유경, 2022). 이처럼 ESG 개념은 회사의 주주 이외에도 투자자를 비롯한 다양한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로의 전환 과정에서 등장했으며, 오늘날 ‘기업’은 사회 구성원의 중요한 일원으로 법적·경제적·사회적·윤리적 권리와 책임의 주체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데에 대한 공감대가 점차 강화되고 있는 추세다(최남수, 2021).
한국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드물 정도로 빠른 속도의 경제성장과 정치적 민주화를 경험했으며, 1980년대부터 불평등과 불공정 문제 해소를 위한 복지국가 건설, 문화와 환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처방의 실험장實驗場이기도 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원칙과 절차를 다소 우회하더라도 최상의 결과를 도출하는 것이 중요하게 인식되기도 했다. 그러다 2000년대 초반부터 생명, 안전, 기업인권 경영과 사회통합, 환경 등 사회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다방면에 걸쳐 이루어진 것 또한 사실이다. 특히 산업안전과 노동, 공정거래와 소비자보호, 기업지배구조 등의 문제는 명확한 법적 기준을 마련하고, 엄격한 행정 규제와 형사처벌 체계를 도입함으로써 부분적으로나마 개선되기도 했다. 이 같은 의미에서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법률 제179007호, 이하 「중대재해처벌법」)의 제정은 산업안전과 보건, 건강의 영역에서 기업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차지하는 중요한 의미를 확인하는 계기로 평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중대재해처벌법의 제정과 기업시민의 법적 지위

2022년 1월 27일부로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되면서 이 법 적용 대상 기업과 경영 책임자 및 기업법무에 사활을 걸지 않을 수 없는 대형로펌 등을 주축으로 하는 법률시장은 그 어느 때보다 분주한 한 해를 보냈다. 이 법은 “산업 현장에서 발생하는 산업재해 및 인명 피해를 ‘예방’하고, 사업 또는 사업장, 공중이용시설 및 공중교통수단을 운영하거나 인체에 해로운 원료나 제조물을 취급하면서 안전·보건 조치의무를 위반하여 인명 피해를 발생하게 한 사업주, 경영책임자, 공무원 및 법인을 ‘처벌’ 하는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 법의 가장 큰 특징은 종래 「산업안전보건법」과 달리 ‘경영책임자등’을 의무 주체로 규정하여 그동안 의사결정 권한을 가지고 있는 대표이사 등 경영진에 대한 처벌 근거를 마련하는 한편 ‘종사자’의 개념을 도입해 보호 대상의 범위 역시 확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수범자인 개인사업주 및 경영책임자는 자신의 근로자(종사자) 외에도 도급, 용역, 위탁 등을 행한 경우, 제3자의 근로자에 대한 안전·보건 확보의무를 부담하도록 한다는 측면에서 이 법은 최근 가속화되고 있는 ESG 경영에 대한 요구에서 비롯된 유럽發 EU 공급망실사 지침Supply Chain Due Diligence Directive의 실질적 이행 차원에서 우리 산업 전반에 걸쳐 기업이 기업시민으로 거듭나도록 하는 인식의 전환을 가져오는 법적 지위의 재정립으로 평가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법이 단순히 중대재해의 발생을 예방하는 차원을 넘어 행위자를 중重하게 처벌하기 위해 제정된 형사법적 성격을 지닌다는 점에서 기업들은 「중대재해처벌법」적용에 따른 리스크risk 관리를 앞다투어 법적 차원에서 대처하기 시작했다.

따라 경영책임자는 중대산업재해 발생을 미연에 방지하는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사후적인 처리에 대해서도 법적 책임을 부담하게 되었다. 시중에는 벌써부터 법률 해석서와 사례집, 실무 대응책을 주제로 한 단행본들이 쏟아지고 있다.
반면 해당 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산재사고는 10개월 동안 519건이나 발생했으며, 고용노동부는 이 가운데 194건을 입건하고, 단 34건을 검찰에 송치했다(2022년 11월 기준). 검찰이 기소한 사건은 그나마도 4건에 불과하다. 앞으로도 법원의 최종적인 해석까지는 상당한 기간이 걸릴 것이다.
따라서 이 법에 근거한 판례가 축적되고 입법정책적 효과를 분석하기까지는 최소한 몇 년 간 추이를 지켜보는 것이 불가피해 보인다. 그 사이 법망法網을 피하기 위한 다양한 묘책들이 먼저 만들어지는 현실은, 우리 사회에서 외면하기 어려운 여전한 비극일 것이다. 그럴 리 없겠지만, 전관前官 변호사들로 무장한 법무법인들이 기업들에게 검찰 불기소처분을 받을 수 있는 비책祕策이라도 써주기라도 한다면, 기업들은 용한 로펌 앞에 줄을 서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들이 표면적으로 ESG 경영 유행에 편승하는 모양새까지 취한다면, ESG 제도화가 불러일으킬 최악의 시나리오가 전개되는 셈이다.
여기서 되짚어 봐야 할 것은 「중대재해처벌법」 제정을 위해 그동안 우리 사회가 지불한 희생과 비극의 값어치가 결코 적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법은 현재 ‘5인 이상 사업 또는 사업장’에 적용되며, 50인 미만 사업 또는 사업장, 50억 미만 공사에 대해서는 법 시행 후 3년간 적용이 유예된다. 한편, 중대산업재해란, ① 산업안전보건법상산업재해 중 사망자 1명 이상이거나, ② 동일한 사고로 6개월 이상 치료가 필요한 부상자 2명 이상인 경우, 또는 ③ 동일한 유해요인으로 급성중독 등 직업성질병자 1년 내 3명 이상인 때를 의미한다. 이 법에 따라 중대재해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판단하고, 이를 검찰에 송치할지 여부 및 기소 여부에 대한 상당한 재량이 고용노동부와 검찰의 손에 달려 있다.
한편, 중대시민재해의 구성요건까지 고려했을 때 1993년 서해 훼리호 참사, 1994년 성수대교 붕괴사고,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1999년 씨랜드 청소년 수련관 화재사건,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 2011년 가습기살균제 참사, 2014년 세월호 참사, 그리고 가장 최근 일어난 2022년 이태원 참사로 이어지는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을 부정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기업은 이 법이 단순히 기업에게 부담을 가중시키는 규제라는 인식에 입각해 기업과 경영책임자의 책임을 최소화하거나 회피하는 정도로 소극적으로 대응하기보다 기업을 시민市民으로 인정하고, 법적인 권리의 주체이자 책임과 의무를 부담하는 주체로 역할을 할 것을 기대하는 제도라는 점을 간과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ESG 경영 방침의 확립과 안전 확보의 법적 주체로서의 인식 전환

이 법의 구체적인 내용과 체계의 적정성 및 검찰의 기소와 법원의 재판을 통한 실질적인 입법적 효과 달성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사회재난 발생의 반복 속에서 적절한 책임자 처벌과 재발 방지가 도통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에서 우리가 더 이상 인간의 존엄과 생명, 나아가 안전의 가치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합의를 도출했다는 점에서 그 입법적 가치를 찾아야 한다. 이 시기는 공교롭게도 전세계가 전대미문의 코로나19를 경험하는 상황과 더불어 인류 전체의 지속가능성에 근본적인 회의와 자각이 일어난 때이며, 기업의 지속가능한 경영이 그 기업의 근로자 및 그 가족, 나아가 소비자 등과 유리遊離되어서는 가능하지 않다는 문제의식에서 발로한 것이기도 하다.
ESG 경영을 제도화하기 위해서 법률을 제정하고 강력한 규제 수단을 동원할 것인지, 정부의 지침, 고시 또는 가이드라인 등의 연성법soft law 체계에 터 잡아 가능한 자율에 맡길지에 대한 여부는 입법정책적으로 논의될 후속적인 문제들이겠으나 분명한 것은 오늘날 기업이 기업시민으로서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적인 패러다임 전환과정에서 사회와 경제 체제의 지속가능 여부를 상당히 좌우할 수 있는 주체라는 점은 명백하다는 것이다. 이미 우리 사회는 물론 전세계가 성숙한 투자자와 소비자를 통해 광범위한 이해괸계자의 눈으로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평가받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환언하면,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기업일수록 지속가능한 연대連帶와 협력協力을 선도하는 세계기업시민으로 발돋움 하는 품격品格을 뽐내게 될 기회가 찾아온 셈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앞으로 「중대재해처벌법」의 시행이 가져올 변화를 기대한다.

출처 : 기업시민리서치 1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