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부론에서 보는 지속가능경영
국부론에 대한 보편적 오해
경제는 원활한 시장 기능을 통하여 발전할 수 있으며, 시장은 경제활동에 참여하는 개인들의 이기심에 의해서 작동한다. 경제학의 대표적인 명제이고 경제학을 공부한 많은 이들이 의심의 여지가 없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결론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이 명제에 반론을 제기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애덤 스미스(Adam Smith)의 국부론(國富論)과 연관 짓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 까닭을 말하려고 한다.
필자는 1990년 서울대학교 국제경제학과에 입학하여 경제학을 공부했다. 뛰어난 동기, 선후배들 틈에서 그저그런 학점으로 학부를 졸업한 평범한 학생이었고, 경제학 강의들을 통해서 애덤 스미스[1]에 대하여 알게 된 것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손’ 정도가 전부였다. 경제학의 기반이 되는 철학적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작은 궁금함이 이제 나이가 들어 점차 크게 자라나면서, 2018년과 2019년 두 번의 여름방학 기간에 학부생들과 함께 경제학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스미스의 국부론 원저를 읽고 함께 정리해 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국부론의 실제 타이틀은 “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국부의 본질과 원인에 관한 연구)”이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국가의 부는 어떤 특성들로 파악해야 하는지 그리고 국부의 증대에 기여하는 요인들은 무엇일지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고 당시 영국과 유럽의 경제현상들을 취합하여 해답을 찾아가고 있다. 첫번째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 그가 정의하는 국부는 인력에 대한 보상의 크기이다. 즉 대다수의 국민에 해당하는 laborers에게 돌아가는 분배의 몫이 큰 국가가 부강한 국가라고 정의하고 있다.[2]
그런데 왜 우리는 국부론이 이기심에 대한 책으로 이해하게 되었는가? 필자는 국부론 1권 2장 “분업의 원리” 편에서 등장하는 다음의 두 문장에서 원인을 찾고자 한다. 스미스는 우리가 저녁식사 테이블에서 여러 음식들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식재료 제공자들이 자비(benevolence)를 베풀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각자의 이해관계(interest)가 작동한 까닭이라고 한다. 따라서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얻는 과정에서 상대방의 인간애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나로부터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에 대하여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self-interest가 이기심으로 투영되어 독자들의 확대해석으로 이어진 것으로 파악된다.[3] 하지만 해당 내용이 언급된 곳의 전후 맥락과 국부론의 곳곳에서 스미스가 피력하고 있는 견해들을 세심히 종합해 보면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이기심의 작동에 있다라는 해석이 적절한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 일례로 2권 3장 “도시의 성장과정” 편에서 스미스는 다음과 같은 뚜렷한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여러 종류의 소비형태들 중에서 보다 관대한 영혼을 상징하는 것들이 있다. 소득의 많은 부분을 이웃과 나누고자 하는 성공한 사업가들이 있는 반면에, 상응하는 반대급부 없이는 절대 나누고자 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 경박한 사치적 소비를 추구하는 후자의 부류는 [사회적 부를] 낭비할 뿐만 아니라 비도덕적이고 이기적인 것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개인들의 검소한 소비를 통한 사회적 자본의 증대이다. 검소한 소비는 [그에 따른 사회적 부의 축적은] 국가의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경제적 풍요로움을 키우는 데 있어 더욱 크게 이바지한다.”
스미스에게 있어서 이기심이란 우리가 국부론을 논할 때 통상적으로 인지하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르지 않은가? 중상주의 시대 유럽국가들 간의 수입규제 정책으로 야기된 국내독점상인 출현 및 그로 인한 폐해에 대하여 논의하고 있는 4권 2장 “수입규제” 편도 찬찬히 읽어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존경받는 사업가들은 독점추구라는 끔찍한 정신세계에서 탈피해 있다. 오히려 그들은 이웃 사업가들을 방해하기 보다는 도움을 주고자 한다. 제조산업에서 만연하는 정보의 은닉이 없고, 보다 이로운 경영방식을 발견하면 주변에 전파하는 것을 좋아한다.”
국부론에서 스미스는 이기심(selfishness)라는 단어를 매우 제한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우리가 이기심으로 오역하고 있는 단어는 self-interest 이다. 그렇다면 스미스는 self-interest를 통하여 독자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 것일까? 국부론에 앞서 저술된 도덕감정론(道德感情論)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도덕감정론 7부 도덕철학의 체계 편에서 그는 self-interest의 목적에 대하여 서술한다.
“우리가 보편적으로 탐탁치 않게 여기는 부주의하고 절약할 줄 모르는 성품은 자애의 결핍이라기 보다는 self-interest가 목적하는 바에 대한 관심이 결여된 것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self-interest의 목적은 무엇인가? 행위의 적정성을 논하는 1부 2편에서 스미스는 self-interest를 상호공감에서 오는 행복감과 연결을 짓는다. 의무감을 논하는 3부 6편에서는 self-interest가 지니는 특별하고 중요한 목적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세상에는 성실한 마음가짐으로 self-interest의 올바른 목적을 추구하려 하지 않는 비열하고 옹졸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왕실이 국가의 영토를 개척하고 국민을 보호하는 것을 기대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왕실을 경멸한다. 우리는 정당한 방식과 노력으로 이익을 창출하고자 하지 않는 경영자들을 존경하지 않는다. Self-interest의 위대한 목적은 사려(prudence)와 정의로움(justice)을 바탕으로 한—원대한 포부(ambition)라 불러 마땅한—열정(passion)이다.”
스미스가 self-interest의 키워드로 제시하는 prudence, justice, passion이라는 단어들을 후대의 독자들, 경제학자들이 과연 어떻게 이기심과 연관 지을 수 있었던 것인지 불가사의할 따름이다.
사회구성원으로서의 self-interest
국부론과 도덕감정론을 읽어나가며 필자는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줄곧 사용하고 있는 self-interest가 의미하는 바는 도덕감정론에서 드러나는 그의 철학을 견지하며 계승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스미스가 품고 있는 self-interest의 그 심오한 뜻을 짧은 글로 설명하기 어려워서, 다음과 같은 예시들을 통해 필자의 개인적인 해석을 제시해본다. 소방관들이 화재현장에서 인명을 구조하는 과정에서 심각한 상해를 입거나 나아가 생명을 잃는 경우들이 발생해 왔다. 하지만 지금 이순간에도 소방관들은 화재가 발생하는 곳마다 어김없이 인명구조를 위해 뛰어든다. 2019년 대구에서 코비드 사태가 발발했을 때 어떠했는가? 질병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서 많은 의료진들이 자발적으로 대구로 향해 밤낮으로 환자들을 진료했다. 즉, 사회의 구성원 그리고 경제활동 참여자들이 분업의 원리에 입각하여 자신의 재능을 활용할 수 있는 영역에서 본분을 다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각자의 역할들이 공정한 사회에 모여서 국부의 증가에 기여하는 구조를 self-interest의 집합체로 그려본 것이다.[4] 국부론으로 다시 돌아가 1권 1장에서 가장 먼저 제시하는 스미스의 철학을 되짚어 본다.
“모든 장인(匠人)들이 행하는 경제활동들의 결합을 통한 위대한 국부의 증가, 올바르게 통치되는 사회, 모든 경제인구 각자의 기여를 통해 발생하는 풍요는 고스란히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돌아간다. 가장 인색함을 추구하는 구두쇠일지라도 수천 명 사람들의 지원과 협력 없이 스스로만을 챙겨서는 결국 부를 가져갈 수 없음을 인지하자. 호사를 누리는 한 유럽국가의 왕자가 국가경제에 기여하는 것이 근면하고 검소한 개인국민들의 기여도보다 반드시 더 크다고 할 수는 없다.”
내가 아닌 상대방을 먼저 고려하자
마무리하며, 필자는 서두에서 언급했던 스미스의 국부론에 대한 오해를 불러 일으킨 두 문장을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자 한다. “거래를 할 때에는 나의 필요성이 아닌 상대방이 얻게 될 혜택을 우선시해야 한다. 이것은 인류애에 기반한다는 류의 거창한 의미가 아니라 스스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역지사지의 관점에서] 그저 자연스러운 행동인 것이다.” 2010~2018년 애트나(Aetna)사의 CEO로 재직한 마크 베르톨리니(Mark Bertolini, 1956~)는 2015년 4월 미국 경제사회에 반향을 불러온 의사결정을 단행했다. 2009년 이래 시간 당 $7.25이던 연방정부의 법정최저임률을 두 배 이상 상회하는 $16로 애트나의 직원들을 보상하겠다는 발표였다. 애트나의 직원들이 아파서 결근을 하는 경우 사소한 질병이더라도 수일, 수주에 걸쳐 회사에 나오지 못하는 상황을 파악한 그는, 회사에서 “직원들이 아플 때 병원에서 조기에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을 수준의 보상을 먼저 제공한 후에야 직원들에게 회사에 기여하도록 요구할 수 있다” 라고 하며 그의 경영철학을 설명했다. 1987~1999년 알코아(Alcoa)사의 CEO로 재직하며 근무손실발생 재해율(lost workday rate)을 0.126이라는 초현실적 수준으로 낮춘 폴 오닐(Paul O’Neill, 1935~2020)은 어떠한가? 퇴임 연설에서 그는 이렇게 얘기한다. 작업안전이란 결코 경영의 우선순위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숨을 쉬는 것과 같이 작업자들을 위한 전제조건이 되어야 한다.” 필자는 존경받는 경영자들의 의사결정 뒤에는 경박한 selfishness가 아닌 위대한 목적의 self-interest가 자리하고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1] 이하 ‘스미스’로 명명
[2] 국부론에서 애덤 스미스는 경제활동 참여자를 세 부류로 파악하고 (laborers, employers, landlords) 경제활동을 통한 산출물이 각 그룹에 돌아가는 공정한 배분의 규칙을 고민하고 있다. 그는 ‘공정하게 작동하는’ 시장시스템이 그 방도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3] 국부론에서 이기심(selfish or selfishness) 단어가 등장하는 장면은 놀랍게도 세 곳에 불과하다: 수익을 이웃과 나누지 않고 개인소비로 낭비하는 사람, 사치와 과시로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 사회적 부를 축적하지 못하고 있는 국가들의 국민성.
[4] 필자가 이해하는 애덤 스미스의 self-interest는 개별경제주체 수준의 개념이 아니라, 사회라는 보다 넓은 범주에서 탄생하는 개념이다. 그렇기에 경제생태계를 존중하는 지속가능경영 철학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