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시민 시대: 도시와 대학 만든 포스코, 시민 양성할 때
기업시민 개념이 있기까지
근대사회는 자본주의사회이면서 동시에 기업사회다. 자본주의 경제의 본질은 시장경제라기보다 기업경제라는 말이다. 자본주의는 단순히 시장경제가 성장하고 발전한 결과가 아니라, 기업이라는 경제주체의 전면적 등장이 일궈낸 새로운 사회체제다. 이런 점에서 자본주의 경제는 자유시장경제free-market economy가 아닌 자유기업경제freeenterprise economy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윤을 ‘조직적이고 합리적으로 추구’한다는 점에서 기업은, 약탈이나 투기, 횡재와 같은 자본주의 이전의 영리 추구방식과 근본적으로 차별화된다. 기업을 ‘자본주의의 꽃’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자본주의 근대사회의 실질적 주역인만큼 기업에게는 그것에 상응하는 사회적 책임 문제가 늘 따라왔다. 한편으로 이는 사회적 기대나 요구에 대한 기업의 대응이자 반향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업 스스로의 명예나 자부심이기도 했다. 근대 경제학의 원조元祖 아담 스미스가 예찬한 시장원리와 기업활동은 이타적 ‘도덕감정’의 토대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근대 사회과학의 대부代父 막스 베버 또한 자본주의의 기원을 프로테스탄트 ‘윤리’에서 찾았다. 베버가 강조한 것은 종교적 차원의 소명召命, calling이었데, 이는 기업가만 아니라 노동자들에게도 공히 해당되는 사안이었다. 이런 점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 문제는 자본주의의 태동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기업이 가져야 할 윤리적 규율은 1960년대 미국에서 대두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개념을 통해 보다 공식화되고 구체화 되었다. 환경문제나 계급갈등 같은 사회적 이슈가 제기되면서 초기에는 경영이익의 사회적 환원 차원에서 논의된 기업의 사회적 책임론은 그 이후 진화에 진화를 거듭한 끝에 기업경영의 패러다임 자체를 변화시키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언제부턴가 내부적 투명성과 윤리성 제고는 당연지사가 되었고, 이제는 기업이 이해관계자들이나 지역사회와의 공생을 약속하고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적극적 책임까지 자임하는 시대가 되었다.
기업시민 개념은 이러한 추이의 최근판이자 결정판이라 볼 수 있다. 이와 관련된 보다 결정적인 배경은 이른바 제4차 산업혁명이다. 인공지능, 사물 인터넷, 빅데이터, 모바일 등 첨단 정보통신기술이 경제·사회 전반에 융합되어 혁신적인 변화가 나타나는 시대에 초연결hyperconnectivity과 초지능superintelligence으로부터 자유로운 사회적주체는 어디에도 없게 되었다. 기업과 사회의 가치 공유는 이제 기업의 사활을 가늠하는 변수로 작동하고 있으며, 실제 사회적 변화를 주도하는 기업일수록 생존 및 성공 확률이 더 높은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포스코가 창립 50주년을 맞아 ‘기업시민’을 새로운 경영이념으로 채택한 것은 시의적절한 것이다. ‘포스코 기업시민헌장’은 “기업의 경영활동은 사회를 기반으로 이루어지며, 사회와 조화를 통해 성장하고 영속할 수 있다”고 천명했다. 또한 포스코는 “사회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경제적 이윤 창출을 넘어 사회문제 해결에 동참하고 인류의 번영과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데 기여”하겠다고 다짐했다. 요컨대 기업이 시민의 역할을 담당하고 수행하겠다는 각오인데, 여기서 남는 한 가지 고민은 기업 자체가 곧 시민은 아니라는 점이다. 기업에게는 시민권이 없을 뿐 아니라 기업 스스로 인격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기업시민은 기업이 시민을 닮아가고 기업이 시민처럼 행동하는 일종의 역할놀이role playing 내지 역할학습role learning이 될 수 밖에 없다.
열쇠는 새로운 ‘마음의 습속’
포스코가 기업시민이 되는 일은 포스코 구성원으로부터 명실상부한 시민이 되는 것에서 출발한다. 기업이 시민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CEO나 임직원 모두가 진정한 시민의식과 시민정신으로 무장할 것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기업시민을 구체적으로 창조, 학습, 조직, 운영, 전파하는 동력은 궁극적으로 해당 기업의 ‘구성원’으로 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포스코 구성원들이 먼저 시민의 모범이자 전범典範으로 거듭난 다음, 그와 같은 시민의 품격과 역량이 비즈니스 파트너, 이해관계자, 지역주민, 그리고 사회 전체로 파급될 때 기업시민 개념은 마침내 꽃을 피우게 될 것이다.
시민의 자격은 한편으로는 선언적이고 법률적이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누구나 출생과 더불어 시민으로서의 법적 지위를 얻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민의 또 다른 자격들은 후천적으로 획득된다. 개체로서 자립할 수 있는 경제적 조건도 그렇지만 특히 시민으로서의 태도와 마음은 오랜 노력과 진화의 산물이다. 진정한 의미의 시민이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력해가는 것이다. 근대사회의 시민이 과거 백성이나 신민, 부족, 민족, 국민과 개념적으로 다른 까닭은 시민에게는 시민 특유의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마음의 사회학’은 세상을 움직이는 힘을 사람의 마음에서 찾는 학문 분야다. 이러한 전통은 사회학 초기 단계에서부터 있어 왔으나, 최근 들어 여기에 부쩍 탄력이 붙고 있다. 이는 사회적 제도나 구조의 힘을 믿거나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에 기대는 기존의 사회과학이 나름 한계를 맞이했다는 판단 때문이다. ‘마음의 사회학’은 구조 못지않게 인간이 변수이고, 이성 못지않게 감정이 관건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마음의 사회학’이 성립되는 근거는 두 가지 측면에서다. 하나는 마음이 사회적으로 소유된다는 점인데, 마음이란 개인의 소유이면서도 다른 사람들과 공유된다는 의미에서다. 다른 하나는 마음의 역사성으로서, 일시적인 감정과 달리 마음은 장기간에 걸친 습속이라는 의미에서다.
그렇다면 마음의 습속은 바뀌거나 바뀔 수 있는 것인가? ‘마음의 사회학’이 볼 때는 그렇다. 사람의 마음은 타고난 천성이라기보다는 사회적 산물이라고 보는 것이다. 시대와 사회에 따라 마음의 습속은 서로 다르다. 예컨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충성스러운 국민의 마음을 가진 것은 아니다. 또한 애초에 성실한 노동자의 마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도 없다. 우리는 근대국가 및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그렇게 만들어졌거나, 싫든 좋든 그렇게 선택했을 뿐이다. 모든 인간은 궁극적으로 사회화socialization의 결과인 것이다. 새로운 사회체제는 그것에 걸맞는 사람의 몸, 사람의 마음을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 몸과 마음은 하나이지, 결코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사회철학자 미셸 푸코는 사람의 몸과 마음이 바뀌는 일을 ‘인간축적’accumulation of men이라 불렀다. 그가 볼 때 자본주의 근대사회는 ‘충직한 국민’으로서의 신체와 정신, 그리고 ‘성실한 노동자’로서의 신체와 정신을 체계적으로 요구하고 배양해 왔다. 푸코의 인간축적 개념은 카알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발전단계에서 강조한 ‘자본축적’accumulation of capital과 쌍벽을 이룬다. 자본주의는 ‘자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람’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근대 이후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충성스러운 국민의 마음으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땀 흘려 일하는 노동자의 마음으로 사는 것을 당연히 여기지 않는가.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이 대전환을 경험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불과 수 십년 전만 해도 대다수 한국인들은 국민으로서의 확고한 애국심 없이, 그리고 노동자로서의 뚜렷한 자의식 없이 살아왔다. 우리나라에서 국민으로서의 자부심이 싹트고 노동자로서의 자긍심이 쌓이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이후 국가주도 경제개발이 시작되면서부터다. 이 무렵부터 한국 사람들은 국가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게 되었고, 근로자로서의 역할에 나름 의미를 느끼게 되었다. 많은 한국인들은 고도성장과정에서 한편으로는 충성스러운 국민의 마음, 다른 한편으로는 기업에 헌신하는 근로자의 마음으로 재무장하게 된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이와 같은 근대적 의미의 ‘인간축적’이 일어난 대표적인 현장이 아마도 포스코일 것이다. 포스코는 출범 자체가 국영기업이었다. 당시 포스코의 경영이념 또한 ‘제철보국’製鐵報國이었다. 포스코 임직원들은 먼저 애국하는 모범 국민이 되었고, 애사愛社하는 모범 노동자가 되었다. 한마디로 산업전사産業戰士의 마음이었다. 포스코 구성원은 민족을 위해 일을 하고, 나라를 위해 일을 하며, 회사를 위해 일을 하고, 일을 위해 일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포스코 구성원의 전통적 ‘마음의 습속’이 기업시민 시대를 맞이하여 결코 불변으로 남을 수는 없다. 시대정신이 달라지고 기업목표가 바뀌면 구성원들이 가진 마음의 습속 또한 당연히 선제적으로 변해야 하기 때문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듯이 말이다.
개인과 공인으로 거듭나야
‘마음의 습속’habits of heart은 책의 제목이며, 저자는 미국의 사회학자 로버트 벨라다.
그는 마음의 습속이 사회의 지속 혹은 변화에 미치는 효과가 지대하다는 사실을 밝혔는데, 이때 그가 염두에 둔 것은 미국의 민주주의 문제였다. 그에 의하면 미국의 건국이념인 민주주의가 건재한 이유는 ‘개인’을 중시하는 사람들의 마음, 그리고 ‘공동체’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마음이 ‘시민의 습속’으로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문제를 마음의 습속과 연관시킨 학자는 물론 벨라가 처음은 아니다. 19세기 초 미국을 방문한 프랑스의 정치학자 토크빌은 민주주의 혁명이 발원한 프랑스에는 없고 미국에는 존재하는 민주주의의 비결을 다름 아닌 미국인 특유의 마음에서 찾았다.
토크빌와 벨라가 공히 주목하고 있는 것은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만들고 민주주의를 지속하게 만드는 마음의 습속인데, 바로 이곳에 우리가 지향해야 할 ‘시민’ 개념의 핵심이 들어가 있다. 하나는 개인individual이며, 다른 하나는 공인共人, public man이다.
한국이 선진사회로 가는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는 것은 개인의 마음과 공인의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이른바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가 헛도는 이유 또한 개인으로서의 시민과 공인으로서의 시민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포스코가 기업시민이 되려면 포스코 구성원들로부터 먼저 애국하는 마음과 애사愛社하는 마음을 넘어, 개인의 마음과 공인의 마음을 갖춘 진정한 시민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와 다르다. 이기주의는 태곳적부터 도처에 존재했지만,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의 개념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문명의 독창적 발명이었다가 르네상스 이후 서유럽에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개인주의에는 이기주의에는 없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인간의 절대 존엄이고 둘째는 의사의 자기결정이다. 그런만큼 개인주의는 자유주의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자유주의의 기본 단위가 곧 개인인 것이다. 또한 자유의 몫은 누구에게나 같다는 점에서 자유주의야말로 만인평등이다. 앞으로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자유 시민’이다. 한편으로는 이기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집단주의에 현혹되지 않는 그런 시민의 마음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개인은 법적, 신분적으로는 존재하지만 사회·문화적으로는 여전히 미생未生이다. 우리는 여전히 떼를 짓고 무리를 만드는 성향이 강하다. 우리에게 고독하나 절대적인 삶의 주체로서의 개인은 거의 없다. “나는 외톨이가 되고 싶지는 않지만, 사람들이 나를 혼자 내버려 뒀으면 좋겠다”I don’t want be alone, I want to be left alone는 영화배우 오드리 햅번의 말처럼 말이다. 서양에서 개인이 성장한 것은 두 가지 요인 때문이다. 하나는 기독교 문명 속에 절대자 관념이 있어 신분, 가문, 빈부, 인종, 성별의 차이를 떠나 모든 사람이 궁극적으로는 신을 ‘독대’獨對하게 된다. 인간은 본래 혼자인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근대적 이행 과정에서 국민들이 문화인이나 교양인으로 거듭날 기회를 가졌다. 일종의 ‘출판혁명’ 내지 ‘독서혁명’과 같은 것이다. 서양의 경우 금속활자 발명이 지식의 대중적 생산과 보급으로 이어졌지만 우리의 경우는 금속활자를 먼저 발명하고서도 그와 같은 후속타後續打가 없었다. 일본만 하더라도 에도 시대의 무사계급은 일제히 칼 대신 책을 손에 쥐었다.
‘개인’의 마음에 이어 시민의 자격으로 중요한 것은 ‘공인’의 마음이다. 여기서 말하는 공인은 통상적 의미의 공인公人이 아니라, 이웃이나 지역 혹은 세상사에 대해 부단히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공인共人을 말한다. ‘공평할’ 공公이 ‘공적인 것,’ ‘벼슬’ ‘관청’을 의미한다면, ‘한가지’ 공共은 ‘함께 하다,’ ‘같이 하다,’ ‘여럿이 하다,’ ‘이바지하다’는 뜻을 갖고 있다. 영어로는 ‘public man’인데, 이를 우리말로 흔히 ‘공인’公人으로 번역하는 것부터가 사실은 문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공인公人 아닌 공인共人의 전통이 거의 없다시피 하기 때문이다. 공인共人은 개인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개념이다.
물론 우리나라 사람들이 전적으로 이기적 존재인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이타利他의 대상은 혈연이나 지연, 학연을 중심으로 그 범위가 매우 좁은 편이다. 미국의 사회학자 벤자민 넬슨은 서구사회의 인간관계는 크게 ‘부족적 형제애’tribal brotherhood로부터 보편적 타자애他者愛, universal otherhood로 진화해 왔다고 주장한다. 전자가 ‘우리와 그들’ 혹은 ‘적과 동지’의 세계라면 후자는 ‘남남끼리 공존하고 협력하는’ 세계다. 후자의 경우 가까운 사람들의 가치가 절하되면서 역설적으로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타인이 되는 ‘보편적 공동체’를 형성하는 원리다. ‘개인’과 마찬가지로 공인共人의 기원 또한 유럽이다. 미국이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에 따르면 시민으로서 이웃과 타인에게 마땅히 해야 할 의무와 도리 개념은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시작되었다. 도시국가든, 자치도시든 시민의 역사가 제대로 없었던 우리로서는 그런 공인의 관념이 본래 희박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세닛은 오늘날 서구사회에서도 ‘공인의 몰락’the fall of public man이 걱정이라고 말한다.
포스코의 시민생산 역량
기업 스스로가 시민의 역할을 수행하겠다는 기업시민 개념이 생명력을 얻기 위해서는 해당 기업의 구성원이 먼저 시민으로 거듭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 이제 포스코 구성원은 과거 애국愛國과 애사愛社의 위대한 전통을 넘어 주체적 개인과 보편적 공인의 수준으로 올라가야 한다.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의 주인공으로 당당히 살아가는 가운데, 우리 사회는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는 사람들의 보편적 공동체,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는 사람들의 포용적 공동체를 지향해야 하기 때문이다. 익명의 희생, 무명無名의 봉사, 그리고 흔적 없는 선행이 넘쳐나는 그런 세상 말이다.
기업시민을 새로운 경영이념으로 내세운 포스코는 이러한 시민의 새로운 탄생을 선도할 역량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나라에 충성하고 기업에 헌신하는 ‘인간축적’의 경험을 가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포스코는 도시를 만들고 대학을 만든 경력이 다른 기업에 비해 너무나 출중하다. 도시를 만든 기업으로서 포스코는 이제 도시의 주인인 시민의 품격을 말할 의무와 권리가 있다. 대학을 만든 기업으로서 포스코는 이제 교양있는 문화시민을 말할 명분과 근거가 있다. 도시를 만들고 대학을 만든 포스코, 이제는 제대로 된 시민을 생산할 때다.
출처 : 기업시민리서치 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