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가치와 네트워크형 혁신
네트워크 시대의 혁신
고도의 기술혁신이 진행되는 21세기는 전례없는 대변화의 시기가 될 것이다. 인터넷을 통해 안방에서 온 세계의 지식과 정보를 습득하고 스마트폰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는 현대인들은 이미 이 변화를 몸으로 체감 중이다.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으로 초연 결성은 더욱 강화될 것이기에 우리에게 익숙한 사회적 관계, 조직의 경계, 위험의 형태, 정체성과 가치관 전반에 심대한 변화가 따를 것이 분명하다.
디지털화와 연동된 이 대변화의 시대적 특징을 사회학자들은 유동성, 액체성, 불확실성 등으로 설명한다. 실제로 우리의 삶은 모든 부문에서 유동적이고 불확실하며 비정형적인 상태로 변하고 있다. 새로운 가능성이 확대되는가 하면 전례없는 위험성도 함께 증가한다. 개성있는 유투버를 강력한 인플루엔서로 만들어준 네트워크의 힘이 유명한 스타를 일순간에 몰락시키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혁신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알려진 정답이나 기존관행을 추종하는 방식으로는 이 격동의 시대에 낙오되기 쉽다. 실제로 전세계는 전통적인 업종 구분, 생산과 유통 및 소비의 연계 방식이 혁명적으로 바뀌는 산업구조상의 대전환을 겪고 있다. 문제는 혁신의 내용과 방향이다. 21세기의 혁신은 이런 디지털 기술혁명의 요소들을 적극 수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이 사회적 가치가 21세기 혁신의 핵심으로 대두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회적 가치
사회적 가치란 기존의 발전양식에 대한 성찰로부터 파생된 개념이다. 이기적 경쟁심을 적극 활용한 근대의 모델은 물질적 성장이란 측면에서 큰 성과를 가져왔지만 적지 않은 사회문제도 양산했다. 환경오염, 자원고갈, 사회적 양극화, 폭력과 증오의 감정 등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인류공동체의 존속을 위협할 정도로 심화되고 있다. 이런 문제에 대응하려는 국제적 노력들로부터 사회적 가치가 강조되고있다. 무분별한 개발주의를 극복하려는 유엔의 노력, 양적 성장 대신 질적 성숙을 지향하는 유럽연합의 삶의 질 패러다임 등이 그것이다. 한국에서도 사회적 가치실현을 추구하는 법이 제정되어 공공기관의 사회적 가치 실현이 강조되고 사회적 가치를 표방하는 시민운동도 출현하고 있다. 대기업 가운데서도 재무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의 동시추구를 강조하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과연 사회적 가치란 무엇을 지향하며어떻게 추구될 수 있는가?
••공동체와 상생
사회적 가치는 공동체 자원의 재발견에서 시작한다. 근대 자본주의사회는 구성원들간의 경쟁원리를 긍정적으로 제도화했고 부국강병의 발전주의를 주요한 가치로 수용했다. 공동체적 간섭을 배제한 시장의 투명성을 환영했고 사적 이익추구가 시장을 통해 공동체의 이익으로 전환되리라 믿었다. 하지만 이런 발전방식은 공동체 차원에서 작동해온 유익한 자원들을 약화시키고 무시하는 결과를 낳았다. 신뢰와 협조, 배려와 공유의 가치가 사라진 곳에서 사회적 양극화, 계층갈등, 환경파괴와 같은 많은
문제들이 출현했다.
네트워크 사회에서는 모두가 함께 잘살아야 나도 잘살 수 있는 사회적 연쇄가 더욱 강하게 작동한다. 나만 잘 되겠다는 이기적 경쟁은 상호연결된 나와 남 모두를 파괴할 수 있다. 오히려 능력있고 유능한 타자가 되도록 협력하는 것이 나의 성공에도 유익한 것이 네트워크 사회의 특징이다. 따라서 무한경쟁의 논리보다 상호부조와 협력경제에 대한 관심을 강조하고 ‘공유지의 비극’보다 ‘공유지의 효용’을 더욱 주목할 필요가 대두된다. 오늘날 ‘커먼스’에 대한 다양한 관심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다. 값비싼 도심의 대형건물의 1층 공간이 다수 시민들의 휴식처로 제공되는 것, 신뢰자산을 이용한 공유경제를 확대하는 것, 모두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공적 인프라를 확대하는 것, 상생의 가치를 강조하는 것 등은 모두 이런 노력의 일환이다.
••지속가능성과 환경
사회적 가치는 지속가능성에 대한 민감한 태도를 요구한다. 그동안의 발전모델이 지나치게 물질적인 성장을 우선시하였고 화석연료의 소비와 무한경쟁이 가져올 위험을 경시했다는 반성이 포함되어 있다. 지속가능성을 대안적 가치로 내걸었던 유엔은 성장제일주의 전략으로 인해 지구공동체가 위태로운 상태로 내몰리고 있음을 계속 경고하고 미래 세대까지 배려하는 대안적 발전을 위해 노력할 것을 주장해왔다. 한편으로 환경파괴를 막고 자원의 무분별한 남용을 억제하면서 상생과 절제, 공유와 같은 대안적 생활양식을 발전시키는 것은 사회적 가치의 주요 내용이다.
사회적 가치는 경제적 이익추구와 꼭같이 생태적 공유조건의 질을 높이기 위한 사회적 책무의식을 강조한다. 특히 4차산업혁명의 시대에는 융합과 소통, 상호영향의 정도가 전에 없이 커지게 마련인 바, 다양한 요소들이 균형을 이루도록 총체적 시각을 견지하는 것이 요구된다.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고 공동체의 자생력을 키우는 공생의 노력은 미래세대를 위한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서 뿐 아니라 대안적인 질적 성장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사회적인 데이터가 집합재로서 공공의 가치, 상생의 가치와 연결될 수 있도록 하고 경제-사회-환경의 동적 균형을 지향하면서 상생과 지속적 발전의 생태적 기초를 강화하는 것이 사회적 가치의 중요한 내용이다.
••안전과 일자리
사회적 가치가 실현되는 미시적 영역은 안전과 일자리다. 안전은 각종 위협과 재난으로부터 보호받고 일상의 평안을 유지할 수 있는 조건의 확보를 가리킨다. 기본권적 권리의 보장, 빈곤과 기아로부터의 해방, 전쟁과 질병, 각종 차별로부터 보호받는 것이 안전의 주된 내용이다. 최근 한국사회에서 결혼이 기피되며 인구재생산마저 위태로울 정도의 저출산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이런 사회적 보호와 안전의 보장에 심각한 위기가 도래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결혼과 육아를 가능케 해 줄 최소한의 생활공간이 보장되는 것은 개인적인 숙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일자리의 제공은 사회적 가치실현의 중요한 요소다. 현대사회에서 일은 단순히 생계를 보장하기 위한 노동에 그치지 않고 한 인간의 존재가치를 확인하고 사회적 상호작용을 구성하는 문화적 활동이기도 하다. 따라서 직장은 단지 돈을 벌기 위해 나가는 곳이 아니라 유의미한 관계를 형성하고 역할을 확인하는 공적인 현장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디지털혁명이 초래하는 조직과 직업상의 변화, 일자리 감소현상에 적극 대응하면서 새로운 일을 찾고 의미있는 활동공간을 창출하는 노력이 중요하다. 기업은 이런 점에서 사회적 가치 실현의 중요한 주체가 된다.
••역능성과 참여
사회적 가치는 다양한 주체들의 자발성과 참여를 중시한다. 따라서 이기적인 동기를 넘어서는 공동체적 헌신과 배려를 내면화한 시민의식의 고양이 사회적 가치의 주요 내용을 구성한다. 연대와 배려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문화, 협력과 헌신의 가치를 가르치는 교육이 요구되는 이유다. 인간이란 ‘합리적 실익 극대화’를 지향하는 이기적 존재이지만, 동시에 공동체 내의 다른 구성원들과 협력하고 상호신뢰하면서 함께 사는 존재이기도 하다는 점을 사회적으로 확산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사회적 가치는 고유한 개성, 능력, 품성, 존엄이 실현되는 것을 중시한다. 따라서 사회 구성원들의 역량과 잠재력을 존중하는 민주주의와 친화적이다. 역능성의 존중은 단지 개인의 존엄을 인정하는 차원에 그치지 않고 사회의 혁신을 가능케 하는 자산이 된다. 혁신은 개성적 조합, 자율적 단합, 이질적 통합, 유기적 연대와 같이 개인적 특수함이 집단적 속성과 공존하면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현할 수 있는 창의적 환경이 주어질 때 가능한 속성이기 때문이다. 개인이나 조직을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는 대리인/대리격이 아니라 스스로 가치를 조직하고 만들어내는 역능적 행위자/행위체로 교육하고 대우하는 환경조성이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사회적 가치의 실천영역
사회적 가치는 다양한 요소들을 포함하는 포괄적 과제인만큼 이를 실천하는 주체나 실행영역도 단일하지 않다. 다음과 같은 4개의 실행영역이 사회적 가치와 관련하여 고려되고 실천에 옮겨지고 있다.
••사회적 경제
사회적 경제는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동시에 추구하는 특별한 경제활동 영역을 가리킨다. 사회적 경제를 표방하는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 지역단위 생활공동체 등이 경제적 가치와 함께 사회적 가치를 추구한다, 사회적 경제는 그동안 사적 이익과 공적 자선을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국가의 일과 시장의 일을 별개로 간주하던 방식을 비판하고 경제활동과 사회활동, 이기주의와 이타주의를 연결시킬 수 있음을 주목한다.
실제로 사회적 경제를 표방하는 사회적 기업들 간에는 연대와 협력, 호혜적 도움이 드물지 않다. 물론 이익추구와 사회적 가치 추구의 균형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는 주체별로 또 영역별로 동일하지 않다. 사회적 경제는 공식/비공식, 영리/비영리, 공공/민간의 축을 부분적으로 가로지르고 통섭하는 방식으로 양자의 균형과 상호작용을 도모한다.
순전히 선한 의지에 의존하는 자선행위와는 달리 사회적 경제는 일정한 경제적 동기를 인정함으로써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고자 노력한다. 애덤 스미스Adam Smith가 바랐던 ‘공감의 범위 내에서의 이기주의’를 추구하는 셈이다. 그 결과 사회적 경제는 개인별로 흩어져 있던 고립된 선의지, 잠재적 이타심을 구체적인 모습으로 제도화시키는데 성과를 거두고 있다. 흩어져 있던 다수의 선의지들을 결집하여 공공적 가치를 실현하는 중요한 활동공간이라 하겠지만 사회 경제는 대체로 규모가 크지 않고 현실자본주의의 힘 앞에서 그 영향력의 범위도 제한적이라는 한계가 없지 않다.
••공공구매와 공공서비스
이런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정부 및 공공기관의 재정집행을 사회적 경제와 결합시키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 사회적 가치를 지향하는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의 활동을 뒷받침하고 지원하는 제도적 인프라를 공공재정의 운용과 결합시킴으로써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것으로 ‘공공서비스’ 또는 ‘사회책임조달’이라 부르기도 한다. 공공기관이 필요로 하는 각종 소요물자의 구매과정에서 경제적 원리보다는 사회적 약자 보호나 균형을 최우선으로 함으로써 사회적 경제 영역을 활성화하고 궁극적으로는 사회문제를 해소함으로써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겠다는 구상인 것이다.
공공기관은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정적이고 규모가 큰 재정을 운용한다. 이 과정에서 이윤을 추구하는 조직과는 달라 공공기관은 최저가 구매가 아니라 최적가치 실현을 목표로 하는 구매가 가능하다.
이러한 공공구매나 공공 서비스를 통해 시장에서의 경쟁력은 약하지만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기업이나 활동을 지원할 수 있다. 공적 재정 지출에 기초하는 것인 만큼 즉각적이고 가시적인 성과를 도출하는 데도 유리하다. 정부의 공식의제 속에 사회적 경제가 포함된 것은 사회적 가치 실현에 긍정적이다.
다만 이러한 공공구매의 실현과정에서 관료행정의 한계나 정치적 성과주의의 폐해가 나타날 수 있다. 당연히 실질적인 가치실현을 이룰 수 있는 공공조직의 자율성과 책임성이 뒤따라야 한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
동원할 수 있는 물적 자원이 풍부하고 사회적 영향력이 큰 민간부문, 특히 기업들이 사회적 가치의 실현에 직접적인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최근 확대되고 있다.
실례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CSR 개념은 이미 중요한 경영원리로 자리 잡았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CSR의 구체적 내용은 사회와 기업의 수준에 따라 다양하지만 환경가치의 보호, 일자리 창출이나 사회적 약자 보호 등 사회공동체가 해결해야 할 과제에 대한 기업적 책임이 강조되고 있다.
기업의 존재 이유를 경제적인 것과 사회적인 양 측면에서 찾으면서 환경, 빈곤, 교육, 보건, 지역사회 등에 대한 공헌까지 기업의 책임영역으로 논의되고 있다. 기업가의 선행이나 자선, 시혜의 차원에서 부분적으로 행해지던 사회공헌이 이제는 기업의 중요한 고유업무로 자리잡았다. 최근에는 윤리적이고 규범적인 책임론을 넘어서 가치 창출의 전략적 대응으로 공유가치창출(CSV)이 주장되기도 한다. 기업이 추구하는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는 양립 가능할 뿐 아니라 양자가 공유될 때 오히려 기업경영이 더욱 혁신되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담당할 수 있다. 고질적인 반기업 정서를 지금도 해소하지 못하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특히 이 부분은 중시될 필요가 있다. 대기업의 사회적 가치 중시 노력은 공공기관의 공공서비스와 함께 주요한 실천모델로 앞으로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시민적 자율과 책임문화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기업, 공공기관, 대기업 등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공고한 시민의식과 합리적 의사소통구조가 작동하는 총체적인 사회혁신이 필요하다. 사회적 가치에 대한 공감과 실천력을 내면화하고 이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교육의 내용이 변하고 시민사회의 건강한 활동성이 마련되도록 하는 것이 요체다. 공공성을 향한 시민적 참여와 책임성을 제도화하며 민주적 결집력을 고양시키는 것도 필요함은 물론이다.
특히 동원형 발전주의 시대에 내면화된 성과주의, 권위주의, 관료주의의 패러다임을 넘어서는 것, 자발적 혁신과 창의적 상호작용을 제도화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숨겨진 아이디어의 발굴, 집합지성의 활성화, 정서적 공감을 중시하는 문화의 전환이 시민사회 전반에서 일어나야 한다. 최근 주목을 받고 있는 공유경제는 사회적 신뢰를 자산으로 하여 자율과 책임에 기반한 새로운 비즈니스를 구현하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실제로 효율성이 상대적으로 낮고 영리적 전망이 높지 않은 영역에서 오히려 혁신적 심성과 창의적 모델이 출현할 수 있다. 구성원들의 역능성, 자발성, 시민성을 중시하면서 동시에 사회적 자본과 사회서비스의 니즈를 연결시키는 작업은 시민의 품격을 높이면서 삶의 질을 고양시키는 중요한 고리가 될 수 있다.
결론
4차산업혁명이란 말을 만든 클라우스 슈밥K.Schwab은 인공지능, 로봇공학, 사물인터넷 등이 만들어내는 파괴적 혁신의 속도가 매우 빠를 것임을 지적했다. 실제로 우리는 편리함과 불안함, 가능성과 위기감이 동시적으로 몰려오는 현장을 실시간으로 경험하고 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성공적인 미래를 열어가려면 수동적인 전통 답습이나 권위적인 강제동원 방식은 벗어나야 한다. 공동체적 가치와 네트워크의 상호성을 적극 수용하면서 창의성과 개별성을 훼손시키지 않게 하는 복합적 대응역량을 키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성공과 성취만을 고려하는 이기적 패러다임을 넘어서 공동체 차원의 상생 인프라 구축을 지향하는 대안적 발전전략이 요구된다. 협력의 가치, 상생의 중요성, 신뢰의 자산, 공유의 역할에 눈을 떠야 하고 이런 요소들이 확산될 수 있도록 제도적, 정책적 노력이 경주되어야 한다. 사회적 가치를 실현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변화를 감당해낼 역량을 키우는 일이고 혁신과 책임을 제도화하는 일이다. 사회에 큰 영향력을 지닌 기업, 공공기관, 종교, 학교, 노조 및 시민/사회 단체들은 모두 이런 사회적 가치 실현의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기업시민으로서의 사회적 책무의식을 강조하는 포스코의 새로운 결단도 사회적 가치를 향한 시의적절하고 환영할만한 결정이라 하겠다. 다양한 주체들이 민주적인 상호협력을 통해 여러 가치요소들을 함께 추동해 가는 복잡적응시스템complex adaptive system이 구현될 때 혁신과 상생, 공유와 사유, 권리와 책임의 새로운 균형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기업시민리서치 2호